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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헵타포드B와 친절한 담소

멀고느린구름 2020. 3. 18. 23:31

예전에 잠결에 읽었던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책도 다 시절 인연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재밌는 걸 그때는 왜 그렇게 졸면서 읽었을까나. 헵타포드B의 사고방식에 흥미를 느낀다. 동양 고전식으로 말하자면 전관(全觀)이다. 전관은 반드시 중용과 연관되는데, 어떤 현상을 파악할 때 전체를 조망한 후 가장 적확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禪)을 통해 일대일의 인과율을 뛰어넘는 다층적 인과의 세계를 직관으로 뚫어버리고자 한다. 

 

테드 창이 제시한 헵타포드 B의 사고법은 빛이 이동하는 형태와 같다. 빛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언제나 최소 시간이 걸리는 길을 찾아 날아간다. 빛이 최소시간이 걸리는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날아갈지 그 목적지를 출발하는 순간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빛을 굴절시키거나 반사시킬 수 있는 장애물의 위치도 미리 알아야 한다. 즉, 빛은 출발과 함께 자신 앞에 펼쳐질 모든 미래의 사건들을 이미 알고 있어야만 최소시간의 거리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인간이 상상하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이미 일어난 사건의 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시간이라는 가상의 감옥 속에 기거할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성을 통해 생각하기 때문에 시공의 전단계로 건너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인과, 원인과 결과라는 말은 시간의 용어이기도 하다. 즉, 과거와 미래다. 과거의 원인이 있기에 미래의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헵타포트 B의 사고법을 통하거나 전관을 깨우친 현인, 혹은 선승들은 시간에 연연하거나, 단편적인 일대일의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답을 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예정대로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사건을 그저 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소설을 쓰는 방식은 조금은 헵타포드 B의 사고법과 비슷하다. 첫 문장을 쓸 때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시작점과 도착점 사이의 수 천, 수 만의 문장들이 저절로 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일. 그것이 나의 소설 쓰기다. 오랜 세월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며 살아오다 보니 때로는 내 인생의 어떤 일이 시작되었을 때, 그 결말을 미리 짐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이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되어 와서, 어떻게 진행되어 갈지 나름대로 떠올리곤 한다. 

 

구름정원을 처음 구경한 날도 어쩌면 나는 지금 이렇게 주방에 앉아 글을 쓰고 있을 나를 순간적으로 상상해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랫층으로 물이 센다고 해서 주인 할아버지가 배수관 공사를 위해 집에 방문했다. 기술자분들이 공사를 하는 동안 주인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마침 아랫층 호실 하나가 비어 있다고 해서, 구경을 갔다. 밤마다 드르렁 크르렁 코를 고는 남자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구름정원과 구조가 전혀 달랐다. 크기도 3분의 1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예전에 살던 오리빌라보다 작았다. 그런데 가격은 똑같다고 했다. 나는 주인 할아버지께 더욱 친절한 태도를 취했다. 커피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얼마 남아 있지 않던 3만원짜리 고급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내려 드렸다. 담소를 나누며 기회를 노려 여기서 오래 살고 싶다고 했더니, 월세도 안 올릴 것이니 마음껏 오래 살라고 해주셨다.

 

아아, 내게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앗아갈 예정이었던 인생은 구름정원을 위로선물로 먼저 건넸던 모양이다. 

사실은 위의 문단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헵타포드 B의 얘기는 왜 꺼냈는지 모르겠다. 

 

2020. 3.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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