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문/에세이

귀소본능

멀고느린구름 2019. 12. 29. 08:18

만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도 어떻게든 자신의 집은 찾아간다. 이른바 귀소본능이다. 인테리어를 하는 데도 귀소본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5년 전 일터였던 '좋은커피' 매장을 내 버전으로 복원해보겠다며 어제 주방 벽 한 켠을 페인팅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좋은커피'가 아니라, 연남동 집의 주방에 가깝다. 연남동 집의 주방은 셀프 조색을 통해 만든 색이었는데, 의식하지 못하고 새로 주문한 페인트 색깔이 딱 그 색이다. 나도 모르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공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아뿔싸- 하면서도 아득하게 밀려드는 추억의 파도를 멍하니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밀물은 심야를 훌쩍 지나도록 썰물이 되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아침형 인간의 습성도 고쳐지지 앉아 또 이 시간에 이렇게 자리에 앉아 있다. 

 

광막한 추억을 고통이 아닌 미소로 맞이할 수 있는 계절이 분명 또 올 것이다. 조금씩 연남동 집을 닮은 구름정원도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지금이 아닌 그 계절의 집으로 새로이 돌아가려 하겠지. 

 

외롭고 슬플 때마다 글을 쓰는 인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속에 뭉친 언어들을 밖으로 꺼내놓고 나면 한결 가슴 속이 가벼워진다. 술이나 담배, 마약 같은 것으로 위안을 삼는 이보단 훨씬 나은 편이지 않나. 공연히 연말 휴가를 길게 냈나 싶지만 하루하루 이렇게 비워내면 또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어서 미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부디 과거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한 길을 잃은 나날들이다. 

 

그래도 오늘 아침, 더 아름다워진 새 주방에서 내려마신 커피는 일품이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생의 태어남을 축복하며. 

 

2019. 12. 29. 멀고느린구름.

 

 

'산문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랜 B의 삶  (0) 2020.01.03
무제 2019  (0) 2019.12.31
아주 작은 변화  (0) 2019.12.28
시간여행자와 나  (0) 2019.12.27
여행하는 새들의 계절  (0) 2019.12.12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