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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추석 지나고까지

멀고느린구름 2019. 9. 15. 09:59

음악감상실에는 언제나 나 한 사람 뿐이었다. 대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떠올려 보면 그 음악감상실은 지나치게 성실하게 운영되었다.

 

언젠가의 추석이었다. 모두가 고향을 향해 떠난 뒤에 난 언제나처럼 혼자 자취방에 반쯤 누워서 왁자지껄해진 주인집 가족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래된 단층 구옥의 방 두 개를 자취방으로 내주고 있는 곳이어서 외출을 하려면 반드시 거실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인 할머니는 명절 아침이 되면 늘 내 방을 두드려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거실에 잔치상을 차렸다. 특별히 갈 곳이 없어 명절에도 방바닥에 붙어 있는 것을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아, 늘 인기척을 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한 번은 내 방문 쪽으로 차례상이 차려진 일도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나는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비상행동요령처럼 복지부동 자세를 취했다. 거실이 잠잠해진 것은 오후 2시가 지난 뒤였다. 단체로 영화라도 보러 간 모양이었다.(주인집 친족들의 담화를 방에 반쯤 누워 다 듣고 있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주인집 친족들이 다 떠날 때까지) 시간을 소비해야 했던 나는 즐겨 가던 교내 음악감상실을 찾았다. 운영하지 않을 거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확신이 '시크릿'의 힘을 이끌어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당연하게 음악감상실은 열려 있었고, 나는 당당히 푹신한 소파형 좌석에 앉아 디제이가 틀어주는 모짜르트와 엘가, 그리고 비발디를 들었다. 당시에는 그 모든 일이 라면을 사면 끓는 물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는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그날의 디제이도 나도 무척 외로운 인간들이었다. 

 

추석이 지났다. 옥상정원으로 난 통창 저편으로 뭉게뭉게 가을의 구름들이 자라나고 있고, 나는 비련의 매국노가 되어 일본 피아니스트 니시무라 유키에의 앨범 '상냥함의 의미'를 거실에 반쯤 누워 듣고 있다. 스무 해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명절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나는 늘 "무슨 특별한 약속이 생길지도 몰라!" 라는 터무니없는 예측으로 연휴의 앞이나 끝에 휴가를 내어 더 긴 공백을 만들어놓고는 한다. 예측이 유효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도 역시나 추석 지나고까지 (당연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마도 나는 휴가일인 내일 또한 오늘이나 어제처럼 구름정원을 탈출하지 않고(영화 '엑시트'에 구름정원이 나올 줄이야;) 반쯤 누워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을 것이다. 외로운 일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연상할 바처럼 비참한 일은 아니다. 명절 내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도 나름의 묘미가 있다. 스무 해 가까이 그렇게 살아온 인간이 하는 말이니 신뢰해도 손해볼 일은 아니다.

 

하늘이 높아졌다. 가을은 어쩌면 늘 저렇게 선명하게 자신의 시간을 알릴까. 꽃과 같이 금세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선명하다. 나의 명절만 빼놓고 말이다. 

 

 

2019. 9. 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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