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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학고재 |
마음을 다한다는 것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 그러다 나느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88~89P-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앙드레 고르와 그의 연인 도린은 자신들의 집에서 약을 먹고 동반 자살을 했다. 지구 저 멀리에 있는 늙은 노부부의 자살 소식을 접하는 나의 가슴이 이리도 먹먹해지는 건 왜일까.
사회주의 사상가에서 생태주의자로 건너간 신좌파의 선구자 '앙드레 고르' 는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이 책에서야 비로소 내려놓는 듯하다. 사랑하는 아내 '도린'과 함께 수십년을 살아오면서도 '고르'는 자신의 첫 저서<배반자>에서 '도린'에 대해 평가절하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정정하지 못했다. 고르는 평생을 도린의 지혜와 힘에 의지하며 살았지만 정작 그가 써낸 글 속에서는 도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모든 일을 자기 혼자 해낸 것처럼. 허나 실제로 고르는 도린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룸펜에 불과했을 게다.
고르는 에서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며 사람들에게 진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어떤 철학과 사회 운동, 일도 '사랑' 이라는 '실존'보다는 중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진리 앞에 섰다는 느낌. 글 속에서 노사상가의 삶의 질곡과 깨달음의 깊이가 담담하게 베어난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야 겨우' 여성학 개론 초보 단계의 실천 수준에 이르렀다니! 하고 개탄할 일이다. 허나 가부장 사회가 남성에게, 특히 남성 연장자에게 제공하는 면죄부를 굳이 거부하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는 고르의 모습은 나처럼 아직 가부장성을 모두 버리지 못한 남성에게는 무척 감동적이다.
80년대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여성주의가 생겨나면서 남성 주도의 운동권 세력과 마찰을 빚었었다. 남성 주도의 운동권 세력은 '해일이 이는데 조개 줍고 있다' 라는 모 정치인의 말처럼 역사의 중요 국면에서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사치라고 일축했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여성주의자들에게 여성보다는 혁명이 먼저, 개인보다는 공공이 먼저 라며 무시하고는 했다.
젊은 시절의 고르에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생태주의를 전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가장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고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인이자 아내인 도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르가 그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게 한 가장 강한 힘은 도린의 사랑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고르는 또 한 번 도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이 정답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은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다.
스무 살 즈음 시절의 나는 오노 요코와 존 레논 같은 사랑을,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상대방이 오노 요코와 헬렌 니어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고 오만한 판단을 했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하면 내가 만났던 이들은 모두 오노 요코와 헬렌 니어링처럼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다만 내가 존 레논이나 스콧 니어링 같은 그릇이 되질 못했던 거다. 그 두 훌륭한 남성과 내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신뢰하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바쳤지만 나는 나의 사랑을 불신하고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도 믿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신뢰하고 사랑해주었던 이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이들에게는 사과 대신, 반드시 나는 내가 쓰는 글만큼만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맹세한다.
언제나 나는 내가 좀 더 부드럽고 강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늘 세상과 타인에 대해 열려 있기를 원한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더 아름다워지는 길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 수 있기를 빈다. 그 무엇보다도 내 삶이 야망이나 소유에 바쳐지지 않기를, 내 삶이 오로지 사랑에게 바쳐지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를 구원해야 할 것이다. 나의 비뚤어진 감정과 모순된 행동들, 타인을 할퀴는 무심한 언어들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여성주의 책을 조금 보았다고 해서 내가 여성주의자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나는 아직 멀었고, 가야할 길이 한참이다. 앙드레 고르의 수 십년만의 반성에 감동하는 내가 어찌 감히 여성주의자라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한 가지 다짐할 수 있는 것은 뒤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부디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해져서 내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이런 말을 나눌 수 있는 이가 곁에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2008. 4.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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