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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다운펌 전도사

멀고느린구름 2017. 6. 27. 10:55




그가 다운펌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곧 10여년 전 서촌에 있었던 한 까페를 떠올렸다. 그런 인테리어의 까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까페의 주인은 어지간히도 꼬끼리에 집착하는 남자였다. 당연히 커피잔과 과자를 담은 접시 등에는 모두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것까지는 ‘애호’의 수준에서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의 손잡이가 코끼리 코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은 22세기가 되어서도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을 게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까페의 이름은 ‘그랑블루’였다. - 어째서 코끼리가 아닌가? - 


나와 B, 그리고 다운펌 전도사 될 운명에 대해 몰랐던 C는 서로 절친한 대학 동기였다. 나와 B는 줄곧 장학금을 받고 다닐 정도로 학내 성적이 우수했고, 타고난 지적인 호기심 덕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가까스로 대학에 턱걸이로 입학한 C는 사실 공부 같은 것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고, 최대의 비전은 단지 어머니가 운영하던 피씨방을 무사히 상속받는 것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자주 모이곤 했던 ‘그랑블루’에 모여 코끼리 집착증을 지닌 주인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주인은 어느 해에 갑자기 인도에 다녀온 게 틀림 없어. 그리고 힌두교에 꽂혔겠지. 이 코끼리에 대한 애정은 분명히 종교적인 거야. 시바의 아들인 가네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게 틀림 없어. 거의 자기를 예수라고 생각하는 거지. 커피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건지도 몰라.”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음모론을 펼치기 좋아하는 철학도 B가 말했다. 


“아냐, 주인장은 초딩 때 왕따를 당했어. 학교를 가기가 싫었겠지. 학교를 가느니 코끼리나 보러 가자 싶어서 마침 집 가까이에 있던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하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운명적으로 어린 코끼리를 만나지. 평일 오전의 동물원은 줄다리기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릴 정도로 나른한 곳일 테지. 나른한 공기 속에서 어린 코끼리와 어린 주인은 포유류 특유의 변연계 공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지. 우리는 서로 다른 종이지만 서로를 알고 있어. 우리는 외로워. 라고 말이야. 그때부터 주인장은 코끼리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오케이가 되고 만 거야.”


국문학을 전공한 내가 이어서 말했다. B와 나는 그런 류의 이야기를 탁구 시합처럼 주고 받았다. C는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성실한 군중이 되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와 B, B와 나 중 어느 누구도 C가 열등감에 몸서리 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우리가 3시간 쯤 정치, 사회, 종교, 문학, 과학, 연애 이야기를 떠들다 다시 정치 얘기로 돌아왔을 때 아마도 C는 거의 야채 칸에 3주쯤 방치해둔 깻잎과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3시간 정도 B와 지식 대잔치를 펼쳤더니 나도 조금은 쉬고 싶은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쉬어가는 의미에서 사실은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보았었다. 


“그래, 한반도 대운하 같은 건 정말 터무니 없는 이야기지. 21세기라구. 20세기를 살면 안 되는 거야 우리는. 그나저나, 내가 이 까페를 오다가 새로 생긴 미용실 광고판을 우연히 봤는데… 거기 파마 종류 중에 ‘다운펌’이란 게 쓰여 있더라. 미용계는 아무래도 따라가기 어려워. 샤기컷, 울프컷, 매직스트레이트… 어딘가 사기 같고 음흉하고, 마술 같잖아.”

“다운펌이라… 담쟁이 덩굴처럼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내려오게 만드는 파마일까나?”

“뭐야?! 너네들 설마 정말 ‘다운펌’을 몰라??”


갑자기 C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대화에 참여했다. 하품을 하며 건성으로 다운펌에 대해 추론하던 나와 B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화에 참여한 C는 처음 봤다. 마치 완전체 셀 앞에서 초사이언 1 상태로 여유만만한 미소를 보이던 손오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내 그런 감상은 틀렸다. 당시 이미 C는 초사이언 1 손오공이 아니라 각성에 의해 초사이언 2가 된 손오반 쯤 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니, 이 친구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온갖 얘기를 하더니 사실은 인생을 헛살았구만. 다운펌을 모르다니 말야. 세상에 어떻게 다운펌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 응? 그 다운펌을 말이야. 아주 쉽고, 상식적이고, 누구나 간편하게 이용하는 그런 것인데 말이야. 농담이 아니야. 다운펌에서 담쟁이 덩굴 같은 걸 연상하는 건 아주 넌센스고,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실례가 되는 거라고.”


나와 B는 위풍당당한 C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C의 말대로 우리가 쌓아올린 세계는 팔할이 허풍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잘 들어. 이 세상은 말이야.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견해나, 담쟁이 덩굴 같은 상상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정말로 필요한 건 다운펌 같은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살아가는 거라고. 제 아무리 지구에서 태양계 경계까지의 거리값을 구할 수 있어도 다운펌을 모르면 미용실 문조차 열 수 없는 거니까.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오히려 더욱 부끄러운 일이지. 설마,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미용사에게 이번 대선에서 누구에게 투표하실 겁니까?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안 됩니다. 그 정당 놈들은 뿌리까지 썩었어요. 그런 자에게 투표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얘길 할 거야? 그건 이미 뿌리까지 기성세대가 돼버린 거지. 고작 20대 초반의 나이에 말이야. 그런 뿌리는 미용실 가위로 깨끗하게 잘라버리는 게 좋아. 나라면 미용실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다운펌으로 부탁합니다 라고. 그런 게 가능해야 어엿한 성인이 된 거라고! 알겠어?!”


C는 끝내 스스로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와 B는 숙연해져서 코끼리 까페의 문을 밀고 당당하게 퇴장하는 C를 붙잡지도 못했다. B의 입장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그때 C를 붙잡지 못했던 것을 조금은 후회한다. 붙잡고, 그래서 다운펌이 대체 뭐냐고 물어봤어야 했다. 



2017. 6.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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