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이번에도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딱 한 번 멈춰 서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여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바람이 신선했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 - 조해진 194P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분다. 대류 현상 탓이다. 공기는 풍부한 곳에서 희박한 곳으로 움직인다. 뜨거워진 공기가 대기의 상층부로 올라가버린 빈 자리에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여름의 끝은 어디일까. 지구의 적도 부근이 역시 여름의 끝인 것일까. 계절..
오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초여름의 조각을 주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에 따라 설명해달라고 누가 요청을 한다고 해도 답해줄 수는 없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입수했다. 이 '초여름의 조각'이란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감한데... 애써서 설명을 해보자면 천천히 달리는 차창에 우연히 회색의 돌담과 그 담을 반쯤 덮은 담쟁이 덩굴이 보이는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이다. 봐라. 애초에 내가 그래서 설명하기가 난감하다고 한 것이다. 블루레이 디스크에 1테라 정도 용량의 햇살을 담아오지 않는 한 충분히 상대에게 초여름의 조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 과감하게 초여름의 조각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자. 우리는 방금 전에 초여름의 조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