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지 위의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나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들었다. 그런 탓일까. 가까스로 생명을 부여받은 내 속에는 언제나 죽음으로 미끄러지려는 충동과 끈질긴 삶에 대한 의지가 공존한다. 소설 의 주인공 ‘설雪’에게는 태어나서 단 몇 시간 만을 살다가 떠난 언니가 있다. 설은 종종 생각한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이 삶은 바로 언니의 것이었으리라고. 나치의 폭격으로 하얗게 폐허가 되고 만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새로운 돌을 이어서 얹는 방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바르샤바는 폭격 이전의 모습을 회복했지만 복원된 건물들에는 파괴의 상흔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설은 그 거리를 걸으며 자신 몸 속에도 언니의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떠올린다. 주..
티티새 -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불이 꺼지고, 이 병실이 거대한 어둠이 되면 정말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울고 싶을 정도다. 울면 지치니까, 어둠을 견디는 거야." "하지만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면, 햇살과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 나는 아직도 절반쯤 감은 눈, 호나한 눈꺼풀 속에서 꾸벅꾸벅, 개와 산책하는 꿈을 꾼다. 내 인생은 형편없었어. 좋은 일이라고 해봐야,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 바닷가 마을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잘 있어." 일본 현대 작가 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요? 라고 소개팅 자리에서 누가 물어봐준다면 요시모토 바나나 씨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상대방은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서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