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
분홍저고리. 박창돈 61년 인터뷰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만났고 마음에 품었지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년 간 동거를 하던 연인과 이별하고 다니던 잡지사에 장기 휴가서를 내고 2주 째 집에 틀어박혀 있던 때였다. 부장은 최후 통첩을 했다. 이번 인터뷰를 따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것이었다. 퇴직 당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일 무작정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동네에 내려 배회하다가 동네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오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수면제는 제법 치사량에 가깝게 모여 있던 참이었다. 부장은 내 의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메일로 인터뷰이의 신상 명세서를 보내왔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사진을 보자마자 다음 내용은 읽지도 않고 컴퓨터를 꺼버렸었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