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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세검정>



곁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별빛이어도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시대의 바람, 경북역사인물뎐 : 이야기의 힘II> 율곡의 아우, 옥산 이우



자네, 내 사는 곳 어딘지 묻는다면

산 기대어 강물 내려보이는 사립문 닫힌 곳

때로 구름 담담히 맑아 모래톱 위에 나서면

사립문도 없고 다만 구름만 보이는 곳


君問我家何處住

依山臨水掩荊門

有時雲淡沙場路

不見荊門只見雲


옥산은 안부를 묻는 벗의 서찰을 받고 매학정에 앉아 붓을 들어 답했다. 매학정은 장인 어른이신 고산 황기로 선생께서 지어 사위인 자신에게 물려준 정자로 천혜의 아름다움이 깃든 곳이었다. 옥산은 틈나는대로 이곳에 머물며 옛 시절을 떠올려보거나 담담한 시문들을 지어보고는 했다. 말년에 이와 같은 천운을 누리게 된 것도 돌이켜보면 율곡 형님과 고산 선생 간의 각별한 인연 덕분이었다. 일찍이 아버지(이원수)께서는 을사사화 때 유배된 벗인 묵재(이문건) 선생을 만나러 성주를 종종 왕래하셨다고 한다. 그때 형님께서도 아버지를 따라 성주를 오가던 중 초서로 명나라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던 고산 선생을 만나 교우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우애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자연스레 슬하에 여식만을 두고 있던 고산 선생과 혼담이 오가게 되었다. 고산 선생께서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닮아 재예에 능하고 성품이 바르다는 율곡 형님의 소개에 옥산을 사윗감으로 낙점하니, 그것이 벌써 수 십 해 전의 일이다. 


이제는 스무 해 전 돌아가신 율곡 형님의 혼백도, 임진년 왜란 속의 피바람도 모두 하늘 속에 흩어지고 없었다. 성은에 의지해 쌓은 명성과 권세도 병을 얻어 이리 멀리 처가에 내려앉아 보니 어느 하루 지나가는 뜬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께서 내리신 군자감 정 벼슬을 고사하고 이리 강변에 자리한 지도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옥산은 싯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만족하여, 한 편에 고이 보관해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기대어둔 거문고와 낚싯대를 둘러메고 또 강가로 나서는 것이었다. 행차할 때는 꼭 불러달라는 시종의 간청에 응하는 것은 청하는 당시 뿐이었다. 일찍이 형님께서는 사람에 귀천이 어찌 따로 있을 수 있느냐며 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스스럼 없이 대하셨다. 이제 율곡 형님께서 가고 없으신 뒤 그처럼 행하는 이가 없어졌으니 나라도 형님의 뜻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늘 생각하던 옥산이었다. 내 스스로 거문고 하나 들지 못하면 곧 하직할 때라고 여겼다. 


5월의 하늘은 어린 아이의 눈처럼 맑았다. 그 위를 살찐 염소처럼 구름들이 떼로 몰려 지났다. 매학정 앞으로 흐르는 강물 속에는 아직 어린 물고기들이 어미를 따라 정신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옥산이 자리를 잡고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 어린 고기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로 모여들고는 했다. 동네 아이들도 멱을 감다가 돌아보고, 나룻배 위의 어부들도 지나며 “오늘도 소리가 참 좋습니다. 어르신.”하고 웃음꽃을 피우고는 했다. 옥산은 호남에서 조정에 나가 일을 하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여겼다. 허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복이 미처 율곡 형님께서는 누려보지 못한 지복인 듯하여 숙연해지고는 하는 것이었다. 


헤아려 보면 옥산은 율곡 형님과 어머니 신사임당께서 돌아가신 나이로부터 스무 해를 더 살았다. 두 분 다 불혹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에 옥산은 이제야 막 효제를 깨우치기 시작하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하필이면 아버지와 큰 형님, 율곡 형님도 집을 비우신 때에 어머니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곁을 지킨 것은 어린 옥산과 누이들이었다. 율곡 형님은 천추의 한이 있다면 그때 어머니 곁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시고는 했다. 그리고는 그때 어머니의 눈빛이며, 손의 온기며, 남기신 말씀이며 하는 것들을 옥산에게 묻고 또 물었다. “특히 율곡 형님을 애타게 그리워 하셨습니다.”하는 말을 올릴 때면 여지없이 맺히는 눈가의 눈물이 늘 옥산의 가슴도 덩달아 뜨겁게 만들었었다. 어려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 그지 없었으나, 율곡 형님의 그 뜨거운 그리움이 얼마나 인자하고 현명하신 어머님이었나 하는 것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옥산은 어미 개구리를 따라 이동하는 올챙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하늘과 강은 맑고, 나무는 푸르렀다. 언제 이 나라에 전쟁이 있었나 싶게 산천은 빠르게 제 모습을 회복했다. 허나 조정은 여전히 서인과 동인으로 붕당을 지어 서로를 헐뜯기 바쁘고, 임금께서는 율곡 형님을 잃은 후에 영영 갈피를 잡지 못하시고 간신들의 미욱한 말들에 갇혀 계시니 국운은 날로 쇠잔해져가고 있었다. 세자 혼께서는 영민하고 기개가 있으시나 부왕과 신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계시니 장차 이 나라의 앞날도 개운치 않았다. 옥산은 율곡 형님이 늘 자신을 곁에 두고 국사를 논하시던 때를 떠올렸다.“우야, 내가 국사를 논할 이는 형제 가운데 너밖에 없구나. 내 육신이 강건하지 못하니, 설혹 내가 먼저 하직한다면, 네가 내 뒤를 이어 장차 임금께서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시도록 충심으로 보필하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해다오.”옥산은 자신의 손을 꼭 감싸쥐던 율곡 형님의 두 손에서 전해지던 깊은 충열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옥산은 저도 모르게 빈 강에 대고 사죄했다. 갑자기 산천의 소리가 괴괴하게 다 멎은 것만 같았다. 


옥산은 손을 뻗어 다시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강 저편 빈 들에 바람이 일자 들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멱을 감던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떠나고,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강에는 물고기들의 자취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옥산은 저무는 모든 것들에게 바치는 영가를 연주했다. 먼저 떠나간 이 가운데는 장인이신 고산 황기로 선생도 계셨다. 가끔 장인과 함께 이곳으로 낚시를 나왔던 일을 떠올리니, 옥산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이제 옥산은 고산 선생께서 떠나가신 나이가 되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항상 공자의 말씀을 빌려 군자가 나이 마흔에 이르면 삿된 유혹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고, 쉰이 되면 하늘의 뜻에 따라 처신해야 하며, 예순에 이르면 귀가 순해져 만물을 화평하게 대해야 한다 가르치셨다. 장인이신 고산 선생이야 말로 그에 따라 사셨으니 참으로 군자라 아니할 수 없는 어른이셨다. 글로는 초서에서 따를 자가 없어 초성이라고 불리셨다. 이 눈 앞의 강물이 검게 물들 정도로 글을 쓰고 또 쓰셨다. 옥산은 평생 당신의 아버지가 지은 업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사셨던 장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고산 선생의 부친께서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탄핵에 앞장 서셨던 분이었다. 장인께서는 평생 이를 부끄러이 여겨 스스로 관직을 물리치시고 낙향하여 조부이신 상정 황필 선생께서 초가를 짓고 거처하시던 이곳에 이 매학정을 지어 머무르셨던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매학정도 참 기구한 곳이었다. 첫째 주인은 앞서간 이를 부끄러워 지우려 하고, 둘째 주인은 앞서간 이를 존경하여 세기려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겠는가. 옥산은 그리 생각해보다가 이내 고쳐 생각했다. 눈 앞의 매화나무에 청매실이 하나 둘 맺히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이 강가에 내내 단정학 무리가 모여 지내다 가더니, 봄에는 매화꽃이 가장 먼저 피어 머물고, 이제 여름이 오니 청매실이 맺히는 것이다. 그래, 어찌 사람만이 이 땅의 주인이라 하겠는가. 온갖 탐욕을 일삼고, 살아 있는 것을 함부로 해하면서 저들끼리 귀천을 논하니 어찌 감히 세상의 주인이라 일컫겠는가. 옥산은 고쳐 생각했다. 절개가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산천이오, 초충이구나. 고산 선생께서도 그 하나를 깨닫고자 이곳에 매학정을 세우신 것이 아니겠는가. 


해가 완연히 기울었다. 밤이 내려오자 산천의 경계가 사라졌다. 강물 소리만이 사르륵 사르륵 흘러 넘쳤다. 멀리서 고기잡이배가 불을 밝히고 하류에 있는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적이 사라지자 별들과 달이 강물로 뛰어들어 반짝이며 멱을 감았다. 옥산은 그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어머님도, 율곡 형님도, 장인 고산 선생께서도 이제 모두 고인이 되어 이 세상에 사라지고 없다. 자신 또한 이제 곧 이 세상에 사라지고 없을 테다. 하지만 밝을 때에는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이던 가장 아름다운 빛들이 어둠이 깊어질 수록 저리 형형하게 빛나오듯이 모든 떠나간 사람들의 가장 깊은 뜻도 언젠가는 세상의 미욱함을 밝히며 되살아날 것이었다. 옥산은 생각했다. 어머님이나 율곡 형님의 빛이 저 커다란 달빛이라면 자신은 그 곁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별빛이어도 족하겠다고. 아무려나, 곁에서 빛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외려 어머님이나 율곡 형님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좋겠노라고. 옥산은 강가에 드리워진 대를 거두고, 거문고를 챙겨 다시 매학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빛이 점점 환하게 앞길을 비추었다. 



2014. 8. 8. 멀고느린구름.


*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소설입니다. 

경북콘텐츠진흥원에서 편찬한 <시대의 바람, 경북역사인물뎐 : 이야기의 힘II> 라는 제가 쓴 책에 실려 있는 단편이랍니다 : )

이 책은 시판되지 않는 책이라(도서관에는 있을 수도!) 보다 많은 독자분께 소개하고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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