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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의 시대를 넘어
도올 선생님의 책을 서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도올서원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외람된 일이기도 하고 책에서 풀어놓은 방대하고 깊은 사유를 요약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말자>는 우리 삶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에 여러 독학자들에게 책을 권하는 차원에서 글을 쓴다.
<사랑하지 말자>는 도올 기철학의 요점을 정리해놓은 개론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말이 개론서이지 평소 도올 선생의 저서를 읽어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우주, 천지, 종교를 다루는 5 ~7장은 독파하기에 난관을 겪을 것이다. 도올 선생은 애초에 이 5 ~7장으로부터 책을 시작하려고 하셨으나 대중성을 고려한 출판사의 만류로 순서를 바꿨다고 후기에 밝혀두고 있다. 이 5 ~ 7 장은 세계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도올 선생의 세계관이 '천지 코스몰로지' 이론이 심도 깊게 펼쳐지고 있으므로 본 서만 따로 떼어내어 읽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을 것이다. 이 장들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의 단초를 얻고 싶은 독자들은 도올 선생이 쓴 노자, 공자, 맹자, 동의수세보원 정도의 책들을 이어서 읽는 것이 좋겠다. 종교의 장은 도마복음, Q복음서, 금강경강해,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등의 책들을 함께 읽지 않으면 총체적인 이해에 이르기 어렵다.
1 ~ 4장까지는 우리 나라의 역사 흐름을 꿰고 있다. 비교적 쉽게 읽히고 역사 학습이 미약한 요즘의 세대들이 진지하게 탐독하기에 매력적이다. 9장 음식은 우리의 건강과 식문화를 연계하여 말하며 '오후불식'의 원칙을 강론한다. 서구의 과식하는 디너 문화가 동양의 훌륭한 건강식 문화를 망쳐놓았으며, 우리의 몸이 올바르게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전통의 식문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웰빙의 차원으로 떨어져 몸보신의 욕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고 우리 몸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우리 자신의 적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의 식문화를 회복하는 첩경에는 되도록 5시 이후로는 식사를 삼가는 '오후불식'의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오후 5시 이후에 음식을 삼가는 것만으로 우리 몸의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자연스런 사이클을 회복하고, 대단한 보약을 먹지 않아도 우리 몸은 스스로 그 건강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아니라 지난 번에 선생께서 쓰신 <계림수필>이라는 책을 통해 이 '오후불식'의 원칙을 접하고 나름 성실하게 수행한 바, 상당히 몸의 면역력이 향상됨을 느끼고 있으며, 여전히 가능한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지 말자>에서 가장 주목한 장은 '제8장 사랑'이다. 다른 장들이 주목할만한 내용이 없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그간의 저서를 쭉 탐독했던 나로서는 지금까지 사유의 흐름을 차분히 정리하는 차원으로서도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8장 사랑’은 기존에 논의 되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어 흥미로웠고 그 내용 또한 큰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이라는 명사는 당초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현재 ‘사랑’을 영어의 ‘LOVE’를 번역한 말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당초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을 좇아보면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다’라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고, 이것은 곧 현대어의 ‘그리움’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현대적 ‘사랑’의 의미를 담아 쓰던 말은 ‘괸다’와 ‘사모’, ‘정’정도인데, 이는 각각 그 용례가 달랐다. 괸다는 상대를 아낀다는 의미이고, 사모한다는 것은 역시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정이라는 것은 상대와 교감한다는 의미이다. 이 각각의 언어들은 각 용례에 따라 달리 사용되던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그물 속에 모두 포섭되고 말았다.
서점에 가면 끊임없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대체 ‘사랑’이라는 명사의 의미를 무엇으로 한정할 것인가 하는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명사 ‘사랑’에는 그리움, 아낌, 교감, 바람, 기대, 원망, 동정, 성적 이끌림, 욕망, 질투, 호기심, 이해, 이타심, 양보, 존경, 존중, 구원, 생명, 집착, 인내, 정, 부정, 성관계, 플라토닉 러브, 문화적 감성, 미적 관심 등등등 도무지 다 열거하기도 힘든 모든 인간사의 감정들과 기대, 욕망들이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뭉뚱그러져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엉터리 단어도 없다. 지칭하는 것이 도무지 불분명한 단어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거기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파생된다. A가 생각하는 사랑과 B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인물이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기대와 해석은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적 원인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비만한 단어의 다이어트가 절실하다. 도올 선생은 <사랑하지 말자>에서 명사 ‘사랑’의 의미를 성적 이끌림으로 단순화해야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아가 결혼한 부부사이에는 그러한(성적 이끌림으로서) ‘사랑’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서양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을 차용한 많은 책과 티비 프로그램들 부부의 섹스리스를 문제 시하며 건강한 성생활을 주문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엉터리라고 강변한다. 부부사이의 관계의 교류라는 것이 성적인 꼴림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은 수준 낮은 서구사회의 인식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꼴리면 건강한 성생활을 갖는 것이 좋겠으나, 꼴리지 않는다고 꼴리게 하기 위해서 별의 별 짓을 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부부사이에는 성적 꼴림 외에도 서로에 대한 인간적 이해, 정신적 교감, 문화적 교류, 공통의 정치적 지향 등 다양한 관계의 체인이 존재하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더 심도 깊은 차원의 관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도올 선생의 판단이다.
선생의 판단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단, ‘사랑’이라는 말의 어감을 아끼는 글쟁이의 입장에서 ‘사랑’이라는 명사를 성적 이끌림으로 정의하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다. 나로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애정(아끼고 교감함) 표현법처럼 사랑이라는 명사에 ‘내적인 깊은 이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물론, 내가 이렇게 정한다고 해서, 또 도올 선생께서 그 의미를 한정한다고 해서 세상에 이미 통용된 언어가 쉽사리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언어가 지나치게 비대해져 있다는 현실 인식만은 분명히 공유해야만 하며, 사람의 감정을 나타낼 때에 보다 적확한 표현을 사용하는 습관을 익혀가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짝사랑한 상대를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사람을 떠올려보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움이다. 나는 그 짝사랑의 상대를 사랑한다고 사고할 것이 아니라 그리워한다고 사고하면 그만이다. 내가 그리워하니까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하는 판단은 언어도단이며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그리워하니까 아직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엉터리 순환 사고 속에 빠지면 인간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 본 미모의 상대에게 이끌리고 그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키스를 하고 싶다. 이건 성적인 이끌림이다. 성적인 이끌림은 성적 매력을 지닌 상대라면 누구에게라도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본능이다. 이것을 사랑과 결부시켜서 또 나는 저 사람에게 이렇게 강하게 이끌리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결의할 필요 또한 없다. 역시 내가 저이에게 꼴리니까 난 역시 저 사람에게 꼴리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한 성적 호감을 ‘사랑’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그 속에 온갖 기대와 욕망을 포함시키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단순히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 뿐인데, 그 사람이 마치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나를 구원할 수 있고,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 사람을 영원히 아껴줄 수 있을 것으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해 가는 과정은 지난한 과정이며,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누구를 평생 자기의 몸처럼 아껴준다고 하는 것은 고매한 종교인의 차원으로 자신을 수신하지 않으면 도무지 어려운 일인 것이다.
반대로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해 있고, 상대의 문화적 취향과 나의 취향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 사람이라면 좋은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면서도 ‘성적인 이끌림이 없다’고 해서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 이 모든 번민은 ‘사랑’이라는 언어의 비대함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섣불리 사랑이라는 방만한 언어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들을 보다 예민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내가 궁극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감정을 추구해나가면 그만일 것이다. 내가 지금 혈기 왕성하여 성적 이끌림이 내게 가장 큰 행복감을 부여한다면 그런 이는 그 나름대로 그쪽을 추구해가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행복감을 얻는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그 감정을 보다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생의 뱃머리를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완벽히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가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그러면 대체 내 ‘짝’을 무엇을 기준으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빠르게 유입된 서구의 ‘로만티시즘’은 사실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부분을 드라이브하고 있다. 낭만적인 사랑. 자유연애! 이것이 실제적인 인간 삶의 지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을 가능케 하기 위해 번역되어 도입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언어가 아닐까. 모든 낭만적 비극과 희극의 언어를 내포하고 있는‘사랑’이라는 환상의 언어로부터 낭만적인 사랑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고, 이 환상의 끝은 오늘날 ‘픽업아티스트’의 창궐이라고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층에서부터 근대를 반성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힐링이고 뭐고 우리 자신부터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다음 시대를 이어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무엇에서 출발해야할까. 근대 이전의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대 이전 우리는 어떻게 짝을 찾았고, 그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근대 이전 동양사회의 짝짓기는 그 사회정치적 역학을 우선 걷어내고 생각한다면 ‘인연’이라는 심미적 철학이 그 바탕에 놓여 있었다. 단순히 성적으로 이끌리는 상대와 결합하기 보다 저 상대가 나와 인연이 닿아 있는가 하는 심미적 성찰이 항상 전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동양의 ‘인연론’은 서구의 낭만적 사랑보다 어찌보면 훨씬 더 운명론적이며 로맨틱하다. 하지만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동양의 ‘인연론’은 윤회라고 하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둔 상당히 심오한 인간의 관계망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이다. 서양에서는 최근에야 낭만적 사랑의 한 곁가지로 ‘소울 메이트’라는 개념이 도입이 되었으나, 동양에서는 몇 천년을 이어온 전통의 애정관인 것이다. 서구의 ‘낭만적 사랑’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새로운 지층 이데올로기를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론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
21세기 초입을 살고 있는 우리는 20세기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할 의무가 있다. 특히, 나와 같은 젊은 세대의 역할은 1900년대를 시작했던 계몽 사상가들의 역할에 버금가는 무게를 지닌다. 한 시대를 시작하는 시기에 우리가 있다.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고, 많은 변화들 앞에 담대하게 서야 한다. 그 담대함을 견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겸허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책을 통해,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 도올 선생은 앞서서 그런 배움들을 성실하게 기록해간 학자다. <사랑하지 말자>에는 그 배움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아홉 개의 이정표가 놓여 있다. 배움의 길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다음의 시대를 어떤 시대로 만들 것인가 역시 우리의 몫이다. 지나간 세대를 원망하고 탓하지 말자. 우리가 그들보다 덜 공부하고, 덜 행동한 탓이다. 사람의 목숨은 제한이 있다. 결국 다음 시대는 지금 젊은이의 시대이다.
2013. 1.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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