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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월요일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 다녀왔다. 미샤 마이스키 가족 연주회에 참석한 것이 3월경이었으니 5개월만이다. 청명한 하늘과 거리를 투명하게 만드는 눈부신 햇살이 기막힌 날이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목적으로 예술의 전당을 찾은 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시원한 스포츠 음료 '힘에이드'를 한 캔 들이키고 표를 구입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들의 모습, 친구들과 함께 온 여성들, 깔끔한 원피스로 차려 입고 혼자 전시회를 찾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언제나 이런 전시회나 문화공연을 다녀보면 한국 남자들의 모습은 보기 드물다. 인터넷상에서만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에 대해 떠들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다니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일이다. 자신부터 문화를 접하지 않으면서 문화산업에 대해 운운한들 나아질리가 있겠는가.


  표를 구입하고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가이드를 따라 수 십명의 인파들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가이드의 해설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너무 북적대는 것은 감상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무리들을 앞질러 인적이 드문 그림들부터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전시회의 메인 타이틀 '오르세 미술관전' 보다 부제인 '고흐의 별밤과 화가들의 꿈'이 더욱 알려지고, 광고가 되고 있어 나는 고흐의 그림을 중심으로 한 전시회인 줄만 알았다. 허나 웬걸 정작 전시회에 고흐의 그림은 딱 한 점뿐이었다. 고흐의 그림이 없음에 실망이 앞섰으나 다른 그림들을 보며 이내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다. 평소 좋아하는 그림들만 반복해 보던 터라 처음 접하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수 십여 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나 아래에는 내가 특히 인상 깊게 보았던 그림만 간략하게 소개한다.


한스 토마 / 낮잠

야생미(?) 넘치는 남자와 분홍빛 드레스로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의 모습이 대비된다. 흡사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의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것 같은 이 그림은 강렬하게 표현된 뒤쪽의 뭉게구름과 부신 햇살, 그리고 그늘 아래의 한가로운 연인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자기를 두고 낮잠을 자고 있는 연인에게 심통이 난듯한 여인의 표정도 인상적이다.

알렉상드르 카미델 / 비너스의 탄생

초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다. 순백의 비너스의 모습이 아름답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비너스의 흰 피부가 차갑게 마음의 온도를 낮춘다. 비너스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내려온 아기천사들의 포동포동한 몸이 지상과 천상의 대비를 이룬다. 여성의 육체가 그리는 곡선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인상을 준다. 인간은 둥근 것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직선의 수평선 가운데 자리한 여신의 곡선은 마치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 사이에 화해를 권하는 듯하다.

조르주 로슈그로스 / 꽃밭의 기사

부러우면 지는 거다. 역시 초대형 캔버스의 그림. 압도적인 화사함. 기사의 갑옷에 투영된 세계의 정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꽃의 요정들도 아름답지만 기사도 제법 훈남이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 속이 컬러풀해지는 아름다운 그림. 어떤 우울함도 이 그림이 내뿜는 화사함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만 같다.

펠릭스 발로통 / 공

여름. 소풍. 자유. 이 세 단어가 퍼뜩 떠오르는 그림이었다. 잔디밭과 모래밭 사이의 대비가 선명하다. 여기는 어쩌면 해변일까. 모래밭 이편에는 바다가 있지 않을까. 커다란 차양모자를 쓴 여자아이가 해변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공에서 익살스러움이 느껴진다. 멀리서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근심이 서려있다. 그러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통쾌한 해방의 자유,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탈출이 느껴진다. 보고 있으면 나도 저 아이를 따라 볕이 따스한 어느 곳으로 달아나고만 싶어진다.

필립 윌슨 스티어 / 해변의 젊은 여인

모든 남성들의 기억 속 첫사랑 여인을 그려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 여인의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않지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는 기억만은 선명한 것이다. 저 멀리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다로부터 조금은 따뜻하고 조금은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을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카미유 피사로 / 서리가 내린 들판에서 불을 지피는 소녀

19세기 프랑스의 겨울 풍경은 이랬을까.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가시나무, 소 등에 조금 내려앉은 차가운 햇살, 서리가 내린 들판에서 불을 지피는 소녀와 동생인 듯한 아이의 모습. 시작되는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서민들의 소박한 노력이 조금은 애달픈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다. 장작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새하얀 연기가 따스하면서도 애처롭다.

페르낭 코르몽 / 철공소

산업혁명이 극에 달했던 시절. 분주한 철공소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새까만 연기와 뜨거운 불꽃, 자기 역할에 충실한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발전을 향한 열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 공장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이 이들에게 다가올 어떤 희망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통해 진보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것이었다. 페르낭 코르몽은 그것을 예감했을까. 어쩐지 비쳐드는 햇빛이 쓸쓸하기만 하다.

 프레데릭 바지유 / 분홍색 원피스

낡은 난간에 앉아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마을의 원경을 치어다보는 검은 피부의 여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쓸쓸한 희망이 엿보인다. 굽은 등에서 체념이, 고운 원피스에서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기대가 느껴져 서로 대비를 이룬다. 내게서 멀리 있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기 마련이다. 멀리 있는 꿈, 멀리 있는 연인, 멀리 있는 별들. 그림 속에 멀리 떠가는 구름조차도 세상의 것이 아닌 양 느껴진다.

카를루스 뒤랑 / 장갑을 낀 여인

'장갑을 낀 여인'이라기보다 '장갑을 벗고 있는 여인'이 맞지 않을까. 장례식이라도 다녀온 듯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몸과 그윽한 눈빛, 살짝 치켜 올린 새끼 손가락이 매력적이다. 연인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달려가 품에 안고 말았으리라. 다른 그림을 둘러보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와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이었다. 대형 캔버스에 거의 1:1 등신으로 그려져 사실감이 더했다. 그림 속의 여인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이런 여인이면 좋지 않겠는가.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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