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던 밤, 우리는 청계천변을 걸었어 당신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굳이 단도직입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지는 나 역시 확신이 없지만. 우리는 한 달 후면 오픈할 예정이라는 청계천변에 서서 물길이 흐르는 아래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는 영풍문고에서 처음 만났고, 그 전에는 전혀 만나지 않던 사이였으며, 서로의 본명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운영자님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녀를 줄리아라고 불렀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싸이월드 클럽 ‘로망띠끄’의 운영자로 1년째 활동 중이었다. 회원수는 120여명에 달했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은 나뿐이었고, 댓글을 달아주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불필요한 데이트 ..
종로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걸었다. 종묘에서 안국역까지. 인사동길을 가로질렀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루체른에서의 나와 그를 닮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남극탐사대원처럼 패딩점퍼에 방한 마스크와 두터운 목도리까지 여러겹한 사람은 남국에서 왔을 것이었다. 한편 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이쯤이야 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구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인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도 위에 있는 검은 점 어디에서나 다른 검은 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여행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이국의 여행자가 되어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느낀 뒤에야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걔..